"폭탄 들고 비행기 타니 '어서 오세요' 인사… 남한사람 그때 처음 봐"

25세 처녀 공작원의 임무 - "남조선 비행기를 제끼라" 74세 공작원과 일본인 父女 행세
기내서 우리말 들려 동요했지만 통일위해 희생한다고 생각

"내 실물을 처음 보는 사람마다 '처녀 땐 통통했는데'라고 말한다. TV 화면에서 실물보다 크게 보여진 탓도 있을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안기부에서 보호받고 있을 때 그녀에게 권총 사격을 시키면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공작원 때는 남자 한둘은 상대할 수 있는 격술(擊術) 실력은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앉았다. 이제 24년 전 바그다드 공항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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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들어서는 김현희. /박창순 기자
―폭파 목적으로 KAL 858편에 탑승했다. 그때 당신의 감정 상태를 기억하나?

"평양 동북리 초대소에서 '남조선 비행기를 제끼는 것'이라는 임무를 받았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남조선 괴뢰의 두 개 조선 책동을 막고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라. 적후(敵後·적의 배후)에서 임무를 수행해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그때 당신은 25세 처녀였다.

"공작원으로서도 첫 임무였다."

―그런데도?

"…사실 김승일 할아버지(공작 파트너·당시 74세 추정)가 강심제를 줬다. 비행기에 올라타니 한국말로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했다. 공작원 훈련을 7년8개월 받았지만, 그때 처음 남조선 사람을 봤다. 우리 정체가 탄로 날까 봐 조마조마했다."

―비행기 안에는 우리나라 중동 근로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다는….

"북한에서 연구할 때 외국인이 타지 않는 항공편을 노렸다. 국제 문제가 안 되도록."

―3년 만에 귀국하는 이들이 우리말로 얘기하는 걸 들었나?

"좌석 뒷줄에서 세 번째에 앉았다. 옆자리에는 서양인이 앉았다. 눈을 감고 있으니 우리말이 들렸다. 회사 얘기를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저녁 식사를 마치자 다들 잠들었다. 약간의 동요가 있었지만, 중앙당에서 어련히 알아서 이 임무를 줬겠나 했다. 통일을 위해선 희생돼야 한다는 혁명가로서의 결의를 다졌다."

―그때까지 당신이 알고 있는 바깥세상 정보는?

"세상을 아는 것보다, 북한이 가르친 대로 따르는 로봇이었다. 물론 해외실습도 했다. 바깥세상이 북한보다 풍요롭고 자유로웠다. 하지만 남한이 늘 공격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럴 수밖에 없다고 배웠다. 북한이 어렵고 못살아도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없었다. 용납되지 않았다."

―KAL기 폭파 지령을 받고 김정일을 만난 적 있나?

"없다. 임무를 받고서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납치·테러·해외첩보 임무) 이용혁 부장을 초대소에서 만난 적이 있다."

―왜 김정일의 직접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나?

"북한은 김정일의 직접 지시 없이는 총 한 방도 쏠 수 없는 나라다. 한 달 동안 공작 코스를 정할 때, 할아버지(김승일)가 바그다드 노선이 부당하다고 했다. '전시국가를 지나기 때문에 검색이 까다로울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때 대외정보조사부 과장이 '이미 비준이 난 거니까 이번에 그냥 하라'고 했다. 북에서는 김일성·김정일이 아니면 비준을 할 사람이 없다. 대남부서는 김정일이 책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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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씨는 “공항 검색요원이 시한폭탄 배터리를 빼냈을 때 임무 수행이 틀렸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명원기자 mwlee@chosun.com

1987년 11월 12일 오전 8시 30분, 그녀는 김승일과 함께 평양 순안 비행장을 출발했다. 출발 직전에 "우리는 적후(敵後)에서 생활하는 동안 3대 혁명규율을 잘 지키고… 생명의 마지막까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높은 권위와 위신을 백방으로 지켜 싸우겠다"고 선서했다.

그녀 일행은 그날 밤 모스크바에 도착한 뒤 곧바로 부다페스트(헝가리)로 날아갔다. 거기서 육로로 (오스트리아)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일본인 부녀로 위장해 위조 일본 여권을 사용했다. 그녀는 코트, 스웨터, 구두, 손목시계, 손가방 등 일제상품 위주로 쇼핑했다. 두 공작원에게 주어진 공작비는 1만달러였다. 이들은 오스트리아에서 다시 항공편으로 베오그라드(유고슬라비아)로 갔다. 여기서 함께 따라온 공작지도원으로부터 폭약이 장착된 일제 파나소닉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액체 폭약을 건네받았다. 이라크 항공편으로 바그다드에 들어간 날은 11월 28일이었다.

―왜 이렇게 동선(動線)이 길었나?

"신분 위장을 위해서였다. KAL 858편을 타기 위해 할아버지가 연구를 많이 했다."

―파나소닉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한뼘 크기였던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 스위치 작동 9시간 뒤 폭발한다. 전지약(배터리)이 특수제작된 것이었다. 절반은 폭약, 절반은 라디오를 틀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다른 걸로 대체할 수 없는 배터리였다."

이들이 바그다드 공항 보안검색대를 통과할 때, 검색요원이 "배터리를 갖고 비행기를 탈 수 없다"며 라디오에서 배터리 4개를 빼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KAL기 폭파가 무산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해외를 들락날락했지만 그런 적이 없었다. 소지품을 다 꺼내게 하는 등 검색이 심했다. 아랍 국가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탓이다. 어찌할 줄 몰라 할아버지 쪽을 쳐다봤다. 할아버지가 태연하게 배터리를 주워 끼운 뒤 라디오를 틀었다. '그냥 라디오인데 승객에게 이래도 되느냐'고 항의했다. 그렇게 통과했다."

―만약 거기서 실패했다면?

"계획 담당자들은 문책당하고…. 발각 난 것은 아니었으니 나는 다시 나왔을지 모른다."

이들은 좌석 위 선반에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액체 폭탄을 담은 쇼핑백을 둔 채 중간기착지 아부다비(아랍에미리트)에서 내렸다.

KAL기가 폭파할 경우 아부다비에서 내린 탑승자 15명이 추적 대상이 된다. 그녀 일행은 '흔적'을 지워야 했다. 로마행 비행기로 갈아타는 '도주용' 티켓을 따로 준비해뒀다. 그 티켓은 통과비자 문제에 걸렸다. 어쩔 수 없이 타고 온 항공권에 찍힌 대로 바레인행(行)을 타야 할 운명이었다.

다음 날 아침 바레인 비행기를 탈 때까지 통과여객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미얀마 근해 상공에서 KAL기는 폭파됐다.

―대합실에서 KAL기가 언제 터질지 시간을 계산했나?

"제대로 폭파가 됐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는 우리의 탈출로가 막혀버려 그게 피를 말렸다. 우리에게 수사를 좁혀올 텐데, 대합실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당신은 115명이 죽는 폭파 장면을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자신의 범죄에 대해 죄책감이 덜한 것 아닌가?

"당시에는 죄책감이란 게 없었다. 그런 생각을 했으면 혁명가가 아니고, 북한 공작원이 아니다. 뒷날 유족들과 대면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재판정에서 '네가 했을 리 없다. 왜 안 했다고 말하지 않느냐'는 유족의 절규에 정말 안타깝고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빨리 죽여달라는 생각만 했다. 죽는 것이 쉽고 살아 있는 게 고통이었다. 내가 살아남을 줄은 생각을 못했다."

바레인 공항서 체포 - 입국카드에 신이치·마유미… 姓 대신 이름만 써 꼬투리 잡혀
김승일, 공항 가는 길에 '혹시 모르니' 하며 독약앰풀 건네


토요일 오후, 이들은 바레인에 내려 호텔에 투숙했다. 이슬람권에서는 일요일이 공휴일이 아니어서 여행사가 문을 연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이틀 밤을 묵었다.

"아랍 국가에 대한 기본 정보가 전혀 없었다. 공작 자금 때문에 책상머리에서만 작전을 짰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추적이 시작됐다. 바레인 입국카드 명단에 '신이치' '마유미'라고 적힌 게 단서였다. 일본인이라면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로, 혹은 '하치야'란 성(姓)만 쓴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쓰라고 했다. 신원이 완전히 안 드러나도록 나름대로 계산한 것이었다. 그게 꼬투리가 될 줄 몰랐다. 할아버지 여권은 진짜 일본인을 도용해 문건상 위조가 아니었다. 내 여권 번호는 남자에게 쓰는 번호였다. 하지만 그때까지 유럽을 다녀도 적발된 적은 없었다."

―그날 밤 한국대사관 직원이 호텔로 당신을 찾아오지 않았나?

"포위망이 좁혀 들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모른 척 누워 있었고, 할아버지와 필담을 나눈 뒤 돌아갔다."

―그 직원이 돌아간 뒤 어떤 말을 나눴나?

"할아버지가 '폭발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증거가 없으니 우리를 체포할 수 없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공항으로 가면서 '태연하게 행동하라. 비행기를 타면 끝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혹시 모르니…'하며 말보로 담배(독약 앰풀)를 줬다."

"대학 2학년 때 공작원 뽑혀… 춘향이 역 맡는 줄 알아"

김현희씨는 어렸을 때는 영화배우, 좀 더 자라서는 외교관이 꿈이었다. 그런 그녀가 평양외국어대 일본어과 2학년 재학 중인 1980년(18세 때) 공작원으로 뽑혔다.

"문건을 검토하고 학교에 와서는 나에 대해 요해(了解·파악)한 뒤, 중앙당 간부가 세 차례 면담했다. 아버지는 외교관(당시 앙골라 주재 대사관 근무)이라 출신 성분이 좋았다. 나도 모범생이었고, 일본에 침투시키려는 목적이어서 일본어를 한 내가 합당했던 것 같다."

―그때 '공작원'을 뽑는 심사인 줄 알았나?

"뽑힐 때는 몰랐다. 당시 '춘향이 영화를 찍는다'는 말이 퍼져 있어, 춘향이 역을 맡는 줄 알았다. 김정일이 많이 관심을 가진 영화였다. 선발 심사가 끝난 뒤, 중앙당 간부가 승용차로 집까지 데려다 주며 '옷가지를 챙겨 트렁크에 담아라. 오늘 쉬고 내일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될지 부모님도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뽑혔을 때 선택된 사람이라는 느낌이 있었나?

"중앙당은 힘 있는 데다, 신 같은 존재인 김일성을 가장 가까이 모시는 곳이다. 거기에 뽑혔으니 영광으로 생각했고 들떠 있었다. 부모님을 떠난다는 슬픔은 없었다. 아직 어렸으니까."

―자신이 무엇을 하게 될지를 언제 알았나?

"처음 묘향산 지구에 있는 '금성정치군사대학'에 들어갔을 때다. 여기서 밀봉(密封) 교육을 받았다. 통일을 위해 일한다는 혁명가의 긍지를 배웠고, 통일 혁명을 하다가 실패한 사례 분석, 정보수집, 포섭, 행군, 격술, 사격 훈련, 비트에 은신하는 법 등을 배웠다. 그 뒤로 남한화 교육, 일본인화 교육, 중국인화 교육, 해외실습까지 7년8개월 공작원 교육을 받았다."

―왜 공작조를 2명으로 편성하나?

"혼자는 안 보낸다. 서로 보완하는 면도 있지만, 감시하는 역할도 한다."

―김승일과 일본인 부녀로 위장했다.

"할아버지는 6·25때부터 그 부서에서 일해왔다고 들었다. 병약한 노인과 막내딸이 함께 여행하면 의심받지 않았다. 실제 약을 챙겨주곤 했다. 힘에 겨워 '쉬어가자'는 말을 자주 했다. 1984년에도 같이 해외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할아버지는 남한에 사업 연계를 위해 잠시 들어갔다 나왔다. 한조(組)가 된 것은 그의 경험을 내게 인계하는 면도 있었다."

―김승일과는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누었나?

"공작원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서로 물어서도 안 된다. 자기 본명도 안 밝힌다. 나를 '마유미'로 불렀다. 서로 일본어로 대화했다. 물론 오래 같이 있다 보면 상대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다. 수사받을 때 내놓은 자료가 그렇게 얻은 것이다."

―김승일은 어떤 사람이었나?

"온순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고 연구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양반이 공작원이 됐나?

"성격과는 상관없지 않은가."

김승일은 바레인 공항에서 정체가 탄로 나 독약 앰풀을 깨물고 숨졌다. 시신은 국내로 송환돼 부검처리됐다. 체중이 45kg도 채 안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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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機 폭파범 김현희 <下>
안기부 조사 받을 때 - 수사관들 서울 말씨 상냥, 말 못알아듣는 것처럼 꾸미려 우스갯소리에도 안 웃으려 해… 한국말로 잠꼬대 할까봐 걱정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 자유롭게 말하고 생기 있어… 북한 역사는 김일성만 가르쳐, 한글 누가 만들었는지 몰랐다… 한국역사 여기 와서 알아

"10분 뒤에 로마행(行) 비행기가 뜨는데 그것만 타고 날라버리면 되는데. 이젠 틀렸구나. 탈출하기 힘들겠구나."

김현희씨는 무대에서 독백하는 듯했다.

그녀 일행의 탈출은 바레인공항 검색대에 막혔다. 위조 일본 여권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바레인 주재 일본대사관 직원이 나와 있었다.

"우리는 일본으로 송환될 처지였다. 그때 할아버지(공작 파트너 김승일)가 '일본에 보내지면 비밀만 다 불고 고생하다 죽으니 일본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자결하는 게 낫다. 나는 살 만큼 다 살아서 괜찮지만 마유미는 아직 젊은데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자살을 권유받았을 때의 심경은?

"독약 앰풀을 갖고 있었지만 이렇게 깨물게 되는 상황이 닥칠지는 몰랐다. 마지막이구나. 그때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주저하는 마음은 없었나?

"사실 앰풀을 깨무는 연습을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신호를 해달라. 내가 먼저 깨물고 이를 확인한 다음에 할아버지가 깨물라'고 했다."

일본행 비행기 안에서 하려던 자살 계획은 어긋났다. 이들은 대합실에 억류돼 있었다. 바레인 경찰이 그녀에게 "핸드백을 달라"고 했다. 그녀는 담뱃갑을 챙기고 가방을 건네주었다. 경찰은 담뱃갑도 요구했다. 그녀는 독약 앰풀이 든 담배를 꺼내고 담뱃갑만 건네줬다. 경찰은 "그 담배도 달라"고 했다.

경찰이 담배를 빼앗으려는 순간 그녀는 담배 필터를 깨물었다. 경찰이 덮쳤고, 앰풀이 깨지면서 기화된 청산 성분이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김승일도 앰풀을 깨물고 들이마셨다.

―'음독(飮毒) 쇼'라는 주장도 있었다.

"당시 일본대사관 직원(스나카와 쇼준)이 현장을 보고 쓴 수기가 있다."

2003년 출판된 '극비지령'이란 책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신이치(김승일)와 마유미(김현희)는 격렬한 발작 상태에서 전신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였다. 몸의 모든 근육 말단까지 경련 상태였다. 마유미의 몸이 더 격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심장에 전기 쇼크를 받은 것처럼 몸이 튀어 오르기도 했다. 눈을 감고 입은 조금 열려 있었다. 입 왼쪽에 찢어진 상처가 보이고 피가 묻어 있었다. 이번엔 신이치의 경련이 심해지고 마유미는 조용해졌다….'

―독약 앰풀을 마시려고 했을 때와 그 직후의 상황을 기억하나?

"깨문 순간부터 정신을 잃었다. 기억이 전혀 없다."

―바레인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무엇을 봤나?

"말소리가 들렸다. 내가 살아났다는 걸 알았을 때 정말 괴로웠다. 살면 안 되는데, 이 비밀을 어떻게 지킬 수 있나. 죽은 할아버지가 부러웠다.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나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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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씨는“88서울올림픽 저지 공작이 한국에 와서 보니 선거와 연관돼 정치 사건이 됐다”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이들의 국적과 정체는 아직 불분명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안기부의 한 수사관은 독약 앰풀로 자살 시도를 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북한 공작원'으로 찍었다. 2년 전(1985년) 재일교포 간첩 신광수를 검거할 때 그의 옷깃에서 똑같은 독약 앰풀이 발견됐던 것이다.

신광수는 1986년 사형 판결이 확정된 뒤 1988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이듬해 일본 의원들은 '민주화 운동으로 체포된 재일한국인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한 적이 있다. 당시 간 나오토 일본 총리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렇게 해서 신광수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밀레니엄 사면'으로 풀려났다. 이듬해 비전향 장기수 송환 당시 북한으로 건너갔다. 뒤늦게 일본 경찰은 신광수가 일본인 납북에 관여했다며 국제 수배했다. 간 나오토 일본 총리도 이 문제로 비판받았다.

―당신은 새벽 3시쯤 서울로 가는 대한항공 특별기에 실렸다. 그때의 심경은?

"한밤중에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그때까진 몰랐다. 지프에 태워 어디로 갔다. 비행장 안으로 들어가 멈췄는데, 대한항공 태극마크를 봤다. 한국말이 들렸다. 범의 소굴로 가는 심정이었다. 온갖 고문받고 갈기갈기 찢겨서 비밀만 털어놓고 죽게 되리라."

―기내에 있던 우리 수사관을 보니 어땠는가?

"처음부터 눈을 감아버렸다.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누군가가 '네가 북한 사람이라는 걸 우린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혹시 혀를 깨물까 봐 입마개가 씌워졌다. 장차 받게 될 고문을 떠올리니 무서웠다. 속으로 '굴하지 않고 싸우리라'는 혁명가요를 불렀다."

―국내에 압송된 날은 대통령 선거 전날(1987년 12월 15일)이었다.

"공작 임무를 받고 북한을 떠날 때도 대통령 선거가 있는 줄 몰랐다. 그런 걸 알려주지도 않았다. 오직 서울올림픽 저지가 목표였다. 88년 1월 17일까지 참가국 등록 신청을 받으니 그 전에 타격을 줘야 한다. 그러면 다른 국가들이 신청을 안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보니 선거와 연관돼 정치적 사건이 됐다. 이번 사건으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는 말을 들었다."

―선거에 이용될 것이라는 정세 판단을 못하고 공작한 것인가?

"북한에서도 전두환을 '테러 대장'이라고 욕을 많이 했다. 풍자극도 했다. 그런 군부를 도와주려고 했겠는가."

―당시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을 만난 적 있나?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만난 적이 있다."

―당신은 남산 안기부 지하실에서 조사받았다. 첫날을 기억하나?

"고문받고 험하게 다뤄질 줄 알았는데 수사관이 '오느라 고생했으니 이제 좀 편히 쉬어라'고 했다. 남자들의 서울 말씨가 왜 이리 상냥한가. 그리고 목욕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밤 수사관들은 자해 방지용 입마개를 떼는 문제로 고심했다. 그걸 제거한 뒤 만약 그녀가 자해라도 하면 한국이 고문 조작의 누명을 뒤집어쓸 판이었다. 어쨌든 조사하려면 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자해할 용기가 사라졌는가?

"방 안에서 여러 명의 수사관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짓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비밀을 지켜낼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조사를 받으면서 첫 문화적 충격은?

"다음 날인가 잠결에 수사관들끼리 '누굴 찍었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무슨 선거를 그렇게 하나 의아했다."

―조사받을 때 중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답변했다고 들었다.

"혹시 잘되면 중국으로 추방되지 않겠느냐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빠이취히(百翠惠)'라는 중국인이라고 주장했다. 수사관들은 '네가 북한에서 온 것을 안다' '네가 잘못되게 시킨 김정일이 나쁘지' 말했다. 말을 못 알아듣는 것처럼 꾸미는 건 못할 짓이었다. 자기네끼리 우스갯소리를 할 때 웃지 않으려고 표정 관리를 하는 것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자면서 한국말로 잠꼬대를 할까 봐 신경이 쓰였다."

―당신은 12월 23일 오후 5시쯤 자백한 걸로 되어 있다. 수사를 시작한 지 8일 만이다. 전날에 승용차 뒷좌석에 태워 서울 야경을 보여준 게 주효했다고 하는데.

"그런 구경도 하고, 수사관들이 얘기하는 걸 보면서 느껴졌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전부 달랐으니까. 아무리 내가 거짓말해도 정확한 사실을 들이대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양심의 가책도 들었고."

―수사관이 "이제 이름이라도 알자"고 했을 때 당신이 "쇠 금(金)자"라며 처음으로 우리말을 했다는데.

"공작원으로 뽑힌 뒤 '김옥화'라는 가명을 썼다. 8년 만에 내 본명을 대려니 쑥스러웠다. 한국말을 하면서 자백하게 됐다. 사실 입을 열고 싶어도 나 때문에 처벌받을 북한의 가족이 늘 걸렸다. 인간으로서 진실을 밝히고 죽자, 그게 죗값을 치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 부모 소식은?

"모른다. (눈시울을 붉히며)나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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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훈련 시절 일본어 교사였던 다구치 야예코씨 아들과의 만남(2009년).

―실제 겪어본 남한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자유롭게 말하고 표현하고 생각하는 그런 자유다. 삶에 대한 생기가 느껴졌다. 역사에 대해서도 다시 알게 됐다. 한글을 누가 창제했는지도 몰랐으니.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가장 위대하다는 것밖에 몰랐다."

―역사 지식 부족은 당신 개인의 문제가 아닌가?

"전반적으로 그렇다. 북한 사람들은 역사를 모른다. '삼국이 있었다. 고려가 통일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김일성만 가르치고 그걸로 시험친다. 거짓 교육이었다."

―당신은 과거에 한 언론인을 만나 '남한에서는 히스토리(history)를 가르치고 북한에서는 히즈 스토리(his story)를 가르친다'고 말했다.

"…김일성만 가르쳤으니, 여기에 와서 한국 역사가 있다는 걸 새삼 알았다."

국내 압송 당시 '하치야 마유미'였던 그녀는 1988년 1월 15일 '김현희'라는 이름으로 첫 기자회견을 가졌다. 1990년 3월 27일 대법원은 사형을 확정했다.

"나는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형 선고를 받는 순간 맥이 탁 풀린다고 할까, 눈물이 핑 돌고 주저앉게 되더라. 부모님 생각이 났다. 그때는 나도 별수 없는 인간이었다."

보름 뒤 그녀는 특별사면됐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당신은 어떻게 비칠까?

"나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부정적일 수도 긍정적일 수도…."